핵안보의 역사 :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7 - 북핵위기의 진행 by 루리카

1. 맨해튼 프로젝트와 1945년
2.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서와 퍼그워시 회의
3. "평화를 위한 원자력" IAEA의 창설
4. 핵실험금지조항과 NPT
5. 군축의 노력과 핵확산금지논의
6.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소련의 붕괴
7. 북핵위기의 진행
8. 911테러를 통한 핵테러의 위협
9. 평화를 위한 노력, 핵안보정상회의
부록.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연표
우리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제거하기 위한 국제공조에 적극 임할 것이며, 북한도 이러한 노력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 1992년 남북한이 약속한 비핵화공동선언은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북한과 대화와 교류를 확대하고 북한을 발전시키기 위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 2009년 이명박 대통령 UN총회 기조연설 -
  전 세계적으로 핵무기 보유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NPT체제에서 P5라고 부르는 유엔안보리상임이사회 5개국입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가 이러한 국가들이지요. NPT체제 밖에 있는 사실상 핵보유국으로는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의 3개국이 거론됩니다. 

  북한과 이란은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국가로는 집계하지 않지만, 이들 국가는 공공연하게 핵무기의 존재 사실을 핵실험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인접해있는 북한에 대한 핵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북한의 핵개발 역사
  한국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가속화되면서, 북한 역시 핵무장으로 방위주권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54년부터 북한은 핵개발에 관심을 표했으며, 1955년 '소련과 북한과의 과학기술협력에 관한 5년 협약'과 같은 소련과 북한간의 과학기술 협약을 체결합니다. 1956년 모스크바 두브나에 설치된 핵연구연합기구가 설립됨에 따라, 북한의 과학기술자는 소련으로부터 핵 연구 훈련을 이수합니다.
  1964년 평안북도 영변에 핵연구용 시설이 설치되고 다음해에는 IRT-200형 소형 연구용 원자로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건설이 되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1961년 쿠바 미사일 사태를 관전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가시화 하지만,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더 이상의 핵기술의 공유를 얻어내지는 못합니다.

  1974년 북한은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IAEA에 가입하면서 합법적으로 핵관련 설비를 구입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1980년 북한은 비밀 해제된 영국의 흑연감속 원자로 모델을 통해 독자적인 원자로를 건설합니다.
평안북도 영변에 설치된 북한의 핵시설을 촬영한 위성사진

  이렇게 독자적으로 핵과 원자력이용에 대한 연구와 성과가 나타나자, 미국은 첩보위성을 통해 북한의 원자로 건설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미국은 소련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여, 1985년 12월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기술협약을 맺는 조건으로 NPT에 가입하고 국제 사회의 보호의 틀에 북한을 참여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 북한 영변 핵시설의 수상한 징후
  그러나 북한은 NPT에 가입 후에 IAEA으로부터 핵안전협정을 18개월 이내에 체결하고 사찰을 받아야 하는 의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북한은 이 기간에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대규모 설비를 구축하고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1958년부터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1967년 950개의 핵탄두를 배치하고 있던 것이 최고 보유 기록이지요.

  1991년 12월 노태우 정부로부터 '한반도비핵화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 미국은 한국에 있던 핵무기를 철수시킵니다. 그리고나서야 북한은 1992년에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합니다.
북한이 공개한 영변 핵시설 내부의 모습

  1992년 5월 IAEA에서 처음으로 영변의 핵시설을 사찰하게 됩니다. 그런데 IAEA가 영변 핵 시설을 사찰중에 재처리를 연구한다는 '방사화학실험실'의 규모가 너무 크고, IAEA에 신고한 원자로 3개 중에 5MW급 원자로가 성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핵연료봉을 장착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원자로 출력에 비해 5배가 많은 50톤의 핵연료를 장착하고 있었고, 8000여개의 연료봉이 존재한다는 결과였지요. IAEA는 5MW급 원자로의 핵연료봉의 수와 교체회수를 인위적으로 늘리도록 설계했다는 의혹을 부각시킵니다. 즉, 연료봉을 자주 인출하게 만들어,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핵폭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연구를 하는 것이지요.

  IAEA는 또한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시설 두 곳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결정적으로 IAEA는 북한이 플루토늄을 80g 추출했다고 신고한 내용에 대해 영변 주변 흙을 분석한 결과,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공표하게 됩니다. 결국 IAEA는 NPT 위반 등을 이유로 북한에게 미신고시설 두 곳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청합니다.


- 제1차 북핵위기와 NPT탈퇴선언
  북한은 IAEA의 특별 사찰 요청에 대해 거부를 하였으며, 1993년 3월 12일 NPT탈퇴를 선언, 제1차 북핵위기가 본격화되었습니다. 당시 막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전세계적 핵비확산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경향신문이 보도한 제1차 북핵위기
ⓒ 경향신문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 사회는 북한의 핵문제에 주목하였고, 북핵이 세계 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UN안전보장이사회는 5월 11일 북한의 NPT탈퇴를 규탄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북한은 이에 맞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합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할 경우, 북한 또한 한국에 공격을 가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93년 6월, 뉴욕에서는 미국과 북한간의 고위급회담이 개최됩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반도 문제에 관련하여 미국과 직접접촉을 주장해 왔는데, 이렇게 직접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게 되었으니 나름의 성과였겠지요. 1994년에 북한은 IAEA의 추가 사찰을 수락하였으나,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으로 만드는 재처리 시설로 지목된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시료채취를 거부합니다. 1994년 5월에는 5MW의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임의로 인출함에 따라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 제1차 북핵위기의 절정과 제네바 합의
  1994년 6월 13일 마침내 북한은 IAEA의 공식탈퇴를 선언, 제1차 북핵위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경향신문이 보도한 북한 IAEA 탈퇴 소식
ⓒ 경향신문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의 공습을 검토하고 모의 컴퓨터 실험 등으로 군사적 충돌을 대비합니다. 일본 또한 북한에 대해 대북송금 금지 등의 경제제제와 함께 한때 북한 선제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자국민을 대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이 퍼지자, 저도 기억하지만 한때 쌀과 라면을 사재기하는 진풍경도 연출되었었지요. 북한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폭격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합니다. 미국에서도 결국 대북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경제 재제 이외 미군 1만명 증파로 군사적 압박을 가합니다.
1994년 11월 21일. 제네바 협의를 통해 1차 북핵위기는 일단락 되었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는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특사로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평양으로 급파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을 만나 협상합니다. 다행히 협상의 성과로 1차 북핵위기는 위기를 넘겼고, 계속된 고위회담 끝에 1994년 11월 21일. 제네바에서 미국과 북한은 일명 제네바 합의를 체결합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형 원자로를 건설해주고, 경제원조로 연간 50만톤의 중유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지요. 1994년 11월 1일. 북한은 핵활동 동결을 선언함으로써 1차 북핵위기는 마무리됩니다.


- 제2차 북핵위기 발발의 배경
  한편 미국 공화당에서는 제네바 합의에 의한 북한의 보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합니다. 국제사회에서 핵으로 위협한 북한의 반칙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가 보상을 해 주었다며, 앞으로 이러한 반칙이 늘어날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911사태를 겪은 미국이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갈등은 다시 시작됩니다.
  2002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켈리 차관보에게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 프로그램이 있음을 시인합니다.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과 위협을 표시한 것이지요.

  미국은 2002년 10월 16일. 국무부 서명으로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발표,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즉시 포기를 요구합니다. 이는 제네바 협약의 위반이며, IAEA 및 NPT체제에 반하는 일이었지요. 북한의 핵시설 동결 조건으로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서는 북한의 중유 제공을 중단하고, 경수로 착공 또한 중지한다는 결정을 합니다.
  북한은 이에 동결된 핵시설 가동 및 건설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영변 원자로 감시를 위한 IAEA의 사찰단을 2002년 12월 31일 북한에서 추방하면서 제2차 북핵 위기가 진행됩니다. 2003년 1월10일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하고, 10월에는 영변 5MW의 원자로 정상가동을 선언합니다.


- 6자회담과 2.13합의
  미국과 국제사회는 평화적 해결의사를 밝히고, 중국의 설득 등으로 2003년 남북한과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을 베이징에서 개최하는데 합의합니다. 제1차 6자회담이 진행되었지만, 미국과 북한의 의견차이로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에 등의 합의했다는 중국의 '주최국 요약'으로 마무리 됩니다.
2003년 8월 27일~29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6자회담의 모습.
ⓒ 연합뉴스

  계속되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가운데, 제4차, 5차 6자회담을 진행하며, 2007년 2-13 합의를 기점으로 북핵 문제는 다시 해빙무드로 전환됩니다. 이 합의는 북핵 포기를 통해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절차와 경제 지원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북핵문제의 상징. 영변 핵시설 냉각탑이 폭파되는 모습

  2008년 5월, 북한은 IAEA의 감시요원의 입국을 허가하고 2008년 6월 27일. 영변 핵시설을 무능화하기 위해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를 내외신에 공개함으로써 비핵화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북핵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 이명박 정부 출범과 현재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북핵 전략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는 전제하에 북한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후 3000달러로 끌어올린다는 '비핵·개방·3000 구상'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발표한 후, 북한은 이에 반발, 남북관계는 경색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을 기점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며 북한과의 갈등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소식 직후,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통화하는 이명박 대통령
(사진 : 청와대)

  2009년 5월 북한은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천안함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대남도발이 이어지는 등, 북핵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한편 지난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에 대해 국제사회와 확고하게 합의한다면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초청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기도 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 어떠한 정책이 옳은지의 평가는 당장 내릴 수는 없겠지만, 북한의 핵문제는 전 세계의 중요한 이슈이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북핵문제는 세계 평화를 위해 전세계가 풀어야할 숙제로 아직까지 남겨져 있습니다.

(계속)
이 글은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개최에 대한 이해와 홍보를 돕기 위해 작성하였으며,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의 공식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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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안보의 역사 :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6 -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소련의 붕괴 by 루리카

1. 맨해튼 프로젝트와 1945년
2.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서와 퍼그워시 회의
3. "평화를 위한 원자력" IAEA의 창설
4. 핵실험금지조항과 NPT
5. 군축의 노력과 핵확산금지논의
6.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소련의 붕괴
7. 북핵위기의 진행
8. 911테러를 통한 핵테러의 위협
9. 평화를 위한 노력, 핵안보정상회의
부록.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연표
핵전쟁과 같은 냉전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냉전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제 동서간 양 진영의 군사적 대치상황이 가능한 한 빨리 해제될 수 있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0 6. 4. 스탠포드대 연설 -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미국과 소련의 분위기는 반전된 이후, 세계는 급격한 지각변동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해인 1986년에는 미국과 소련간의 핵무기의 감축만이 논의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핵물질에 대한 위험성이 증명된 최악의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납니다.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1978년 운영이 시작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북쪽 체르노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모두 4기의 원자로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1986년 4월 26일. 역대 최악의 원전사고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간략하게 사고 경과를 짚어보자면,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기동 실험으로 인해 RBMK-1000식 원자로 4호기의 출력이 저하됩니다. 엔지니어의 조작 미숙으로 1/3정도로 출력을 저하시킬 예정인 것을 잘못 조작하여 정지 상태에 가깝게 되었지요. 

  이런 상태에서 원자로를 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출력을 상승시키려고 하다가 원자로가 폭주합니다. 결국 비정상적인 핵반응으로 열이 발생. 감속재인 냉각수를 분해시키고, 수소가 발생되어 원자로 내부에서 폭발합니다. 이 결과로 화재가 발생하고 원자로의 노심용융(melt-down)이 일어납니다. 
  소련 정부는 사고 발생을 숨기다가 사고가 발생한지 이틀 뒤인 4월 28일에 구체적인 피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사고 발생을 인정합니다. 소련정부의 소극적 대응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도하게 된 것은 5월 6일 경이었다는 군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직접적으로는 56명이 피폭으로 사망, 사고 대처 과정에서 약 22만명이 피폭, 250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원자로 주변 30km 이내에 사는 주민 9만 2000명이 강제 이주되고, 43만 명이 암과 돌연변이, 기형 등의 인체 피해를 받았습니다.
1986년 집계된 방사능 낙진의 피해 범위

  이때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가 되는 양이었습니다. 이러한 낙진 피해는 우크라이나 산림의 40%가 오염되고, 북반구 유럽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토양 오염과 동식물을 오염시켰습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학계에 보고된 동식물의 돌연변이 사례는 열거하기 힘듭니다. 결국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국제 원자력 사고척도에 분류된 가장 심각한 7등급 사고로 기록됩니다.
2003년. 석관으로 봉인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수습을 위해 소련은 막대한 양의 자금을 지출하였고, 이는 소련을 붕괴시킨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원자력 안전(Nuclear Safety)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왔고, 한편으로는 방사능 오염과 피해를 통해 핵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핵무기 감축에 기여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 몰타 선언과 소련의 붕괴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 소련은 1983년부터 시작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침공 전쟁에서도 막심한 비용을 지출합니다. 결국1989년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지요.
  10년간의 전쟁은 소련의 경제 지출에 치명적이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한 비용 지출의 과다로 소련은 그야말로 총제적 경제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소련은 이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1989년 11월.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89년에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정책에 힘입어 동유럽 혁명이 발발합니다.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이 유럽에 있던 공산정부가 연달아 무너지고, 11월에는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베를린 장벽도 무너집니다.

  세계 변혁의 한 복판에 선 미국과 소련은 1989년 12월 2일과 3일 지중해의 몰타 해역 선상(船上)에서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만납니다. "냉전은 종식되었다고 선언"몰타 회담은 미국과 소련의 오랜 대립의 시대를 접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몰타 항구에 도착한 소비에트 유람선 맥심 고르키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모습

  몰타 회담에서는 동유럽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대해 소련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과 핵무기를 포함한 양국의 전략무기의 축소 등을 논의하며 미국의 경제 지원 등을 합의하였습니다. 비록 구체적 실천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냉전을 사실상 종식시킨 역사의 방향을 바꾼 회담으로 평가됩니다.
1991년 8월 쿠데타로 인해 모스크바에 등장한 탱크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가속화됩니다. 러시아 내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주의 동요에 휩싸였고,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공화국들이 계속하여 독립을 선언합니다. 고르바초프는 더 이상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각 공화국들의 자치권이 허용된 조약에 서명하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이런 개방과 개혁정책에 대해 소련의 공산당 보수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1991년 8월에 쿠데타를 기도하는 것으로 표출됩니다.
1991년 벨라베자 조약으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은 사실상 해체된다.

  쿠데타는 곧 대중들의 반대운동에 직면하여 이틀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쿠데타에 반대하던 보리스 옐친 등의 개혁파들의 의견에 힘이 실리고, 개혁파는 공산당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공산당의 해체를 요구합니다.

  대내외적인 요구와 급변하는 정세 가운데 1991년 12월 9일 벨라베자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밑 독립국가 연합 창설에 서명하게 됩니다. 마침내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직을 사임하였고, 12월 31일 공식적으로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소련의 해체를 보도한 영국 ITN의 뉴스

- 소련 붕괴로 인한 핵확산
  소련의 붕괴는 핵확산을 부추기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소련 붕괴 전부터 핵 비확산 문제가 꾸준히 이뤄졌었는데,  1982년부터 시작한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에 관해서는 오랜 논의 끝에 1991년 7월, 양국이 START-1에 체결하는데 동의합니다. 

  START-1은 향후 7년 내에 미국과 소련의 핵탄두를 25%와 35% 가량 감축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려는 찰나, 소련의 붕괴로 START-1에 대한 실효성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와 같은 상황이 되었지요.
START-I에 서명하는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소련이 해체되기 전, 소련의 핵무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에 분산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혼란기를 틈탄 허술한 보안상태와 관리 소홀로 핵물질의 도난, 유출, 불법거래가 증가하게 되지요. 

  1992년에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밀반출 기도가 100건 넘게 보고되었고, 핵물질을 선적하다가 적발된 사례도 증가합니다. 밀반출된 핵물질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 실체를 알 수가 없게 되었지요.
구소련의 R-12 핵미사일

  한편 약 10만 명의 기술 인력들과 핵과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외국으로 스카우트 되었고, 1992년에는 북한이 소련 핵 기술자 36명을 데려오려다가 적발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소련 붕괴 직후 발생된 이런 문제점은 결국 국제 사회가 구소련의 핵무기를 해체하고 핵 시설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소련 핵무기의 해체, 넌-루가 프로그램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련의 핵무기 해체와 핵시설 관리를 위한 넌-루가 프로그램(Nunn-Lugar Program) 혹은 협력적 위협 감소 프로그램 (CTR :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Program)이 입법됩니다.

  1991년 민주당 샘 넌(Samuel Augustus Nunn Jr) 상원의원과 공화당 리처드 루가(Richard Lugar) 상원의원이 제안한 이 프로그램은 목적은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해체 지원입니다. 그리고 핵무기와 핵물질의 안전한 저장 및 핵기술을 유출하는 지원 프로그램이지요. 그렇기에 핵안보(Nuclear Security)의 관점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실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91년 넌, 루가 상원의원이 부시 대통령에게 넌-루가 법안을 브리핑한 뒤, 백악관을 떠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목적을 위해 미국에서 비용을 제공하는 법안인 소련 위협 경감법 (Soviet Threat Reduction Act)이 넌-루가 의원의 주도로 통과되면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투스, 러시아에 존재하는 구소련의 핵무기의 해체가 시작됩니다. 해체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 용역을 미국에서 제공하여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유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핵물질의 방호향상과 핵물질 및 기술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러시아 핵무기 관리능력을 개선하기 위한 컴퓨터와 기술을 제공하고, 핵물질 저장고 건축을 지원하였으며, 핵과학자들의 일자리를 알선하는 직업훈련 프로그램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핵물질과 핵기술, 인재유출을 막는 핵안보 분야의 실천적 노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넌-루가 프로그램(CTR)을 통해 해체되는 소련의 핵잠수함

  넌-루가 프로그램, 혹은 CTR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과 맞물려 1993년에는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과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II를 협의합니다. CTR 프로그램은 START에 의거하여 러시아에서 1200여개 미사일의 핵탄두를 제거하는데 큰 일조를 하였습니다. 핵잠수함 8척이 퇴역하였고, 대륙간 탄도미사일 150기 등의 대량살상무기의 감축도 진행되었습니다. 

  CTR프로그램의 성과로는 지난 15년간에 걸쳐 구소련에 산재한 6600여개의 핵탄두가 해제되었고, 핵과학자 5만면의 재교육과 취업 프로그램의 진행, 핵물질의 방호에 대한 교육이라는 결과가 있었습니다. 


-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3국의 비핵화
  이러한 CTR프로그램과 START등의 핵무기의 감축, 해체 및 핵물질의 방호에 관한 프로그램의 체결과 함께, 미국과 국제사회는 경제적인 원조를 약속합니다. 러시아 외의 구소련 핵무기가 산재해있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칸, 벨로루시 3국은 이러한 경제적 원조를 대가로 비핵화를 약속했으며, 1994년 1월 14일. 3국에 산재해있던 구소련의 핵무기를 3년 내에 러시아에 반환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1993년 벨로루시가 NPT에 가입, 1994년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가 NPT에 가입과 함께 비핵지대가 되었습니다.
<관련 사이트>

넌-루가 법안, 또는 협력적 위험 감소 프로그램(CTR) 전문보기 - 영문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I 전문보기 - 영문
UN의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공식 홈페이지 - http://chernobyl.undp.org/english/

(계속)
이 글은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개최에 대한 이해와 홍보를 돕기 위해 작성하였으며,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의 공식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오류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경우, 이 곳으로 메일을 통해 의견을 남겨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핵안보의 역사 :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5 - 군축의 노력과 핵확산금지논의 by 루리카

1. 맨해튼 프로젝트와 1945년
2.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서와 퍼그워시 회의
3. "평화를 위한 원자력" IAEA의 창설
4. 핵실험금지조항과 NPT
5. 군축의 노력과 핵확산금지논의
6.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소련의 붕괴
7. 북핵위기와 제네바 협약
8. 911테러를 통한 핵테러의 위협
9. 평화를 위한 노력, 핵안보정상회의
부록. "맨해튼에서 서울까지" 연표
핵물질에 관한 범죄는 중대한 관심사이며, 이러한 범죄의 예방과 탐지 및 처벌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적절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긴급히 채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핵물질의 물리적 방호를 위힌 효과적인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함을 인지한다.

- 핵물질 방호 협약 (CPPNM) 서문 중에서 -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가 계속 진행되면서, 핵무기를 비롯하여 대륙간 탄도미사일, 장거리 폭격기와 같은 전략무기의 경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후, 핵무기를 이용한 실제 전쟁이 일어날 위협을 느끼게 되지요. 그간 무한 군비경쟁의 부담을 느낀 양국은 쿠바 사태를 기점으로 협상 테이블을 통해 핵전쟁의 위기를 줄이고 군비경쟁의 완화를 논의합니다.
냉전의 완화, 데탕트(Détente) 시대의 1970년대.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관과 미국의 닉슨 대통령.

- 냉전시대와 군축의 노력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항(PTBT)과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등장한 뒤,1960년 말부터 냉전을 완화하는 소위 데탕트에 대한 논의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진행됩니다. 이미 핵의 평화적 이용 예인 하나인 원자력발전소는 1956년부터 운영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력 안전(Nuclear Safety)에 대한 개념은 이미 존재하였고, 1960년대 말의 이러한 데탕트로 인하여 처음으로 핵물질의 이동과 방호를 규정하는 핵안보(Nuclear Security)라는 개념 또한 희미하게나마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 SALT : 최초의 수직적 핵확산금지 시도
  이를 기점으로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핵무기와 전략무기 또한 점진적 감축을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1969년 11월 17일, 미국 대표와 소련의 대표가 헬싱키에서 핵무기와 같은 전략무기의 군축을 비밀 논의합니다. 

  이 논의를 시작으로 전략무기제한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SALT-I 이라는 이름의 핵군축 논의가 시도되지요. SALT-1은 1969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주네프 공산당 서기장이 합의합니다.
1974년 11월 23일. 미국의 포드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관이 SALT-I 코뮤니케에 서명하고 있다.

  그동안 NPT체제에서 시도된 핵군축 노력은 기존 핵보유국 외의 다른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는 수평적 핵확산금지 측면이었다면, 기존 핵보유국의 핵무기 군축이라는 수직적 핵확산 금지측면으로는 SALT-I 이 사실상 처음으로 논의되고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하지만 SALT-I은 진정한 핵군축의 논의라기보다는 서로의 전쟁시도를 억제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여 확실히 파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Strategy)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핵무기를 균형 잡히게 축소 조정하는 것이지요. 어느 쪽도 자국의 영토 전체를 방어하지 못하므로 상대방의 전략무기에 대한 우위성이나 전쟁 억지력을 무효화 하게 만든 것입니다.
1979년 6월 18일. 비엔나에서 카터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관이 SALT-II에 서명하고 있다.

  1979년에는 SALT-II를 체결하게 되는데, SALT-1에 비해 구체적이고 유형별로 무기를 제한하여 2250개로 전략무기를 한정, 축소합니다. 그러나 SALT-II의 경우 미국의회의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상원에서 반발로 비준될 가능성이 낮았습니다.
결국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에 SALT-II를 철회합니다.


- 전략무기감축협상 (START)의 논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SALT-II의 비준이 철회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1960년대 이후 최악으로 치닫게 되는데요. 

  이러한 우려에 NATO의 압력과 반전운동의 압력을 받아 결국 SALT-III 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소련의 협상은 재개됩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SALT-III을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 : Strategic Arms Reduction Talks)라는 이름으로 변경합니다. 1982년에 논의를 시작하게 된 START는 기존의 SALT과 다르게 핵무기를 비례로 서로 줄여나가자는 진정한 감축협상이지요. 

  레이건 행정부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 발사미사일(SLBM)의 탄투를 5000개로 제한하자는 안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1983년에 소련은 반발하여 논의는 일시적으로 결렬됩니다.


-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 : 전략방위구상(SDI)
  한편 레이건 대통령은 긴장이 고조되는 미국과 소련간의 관계를 주시하여 1983년 3월에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핵미사일에 대한 요격 계획을 TV 연설을 용해 발표합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을 발표하는 레이건 대통령

  영화 스타워즈에서 따온 이 계획은 소련의 핵미사일을 우주공간에서 격파하는 계획인데요. 1985년 미국은 레이저 광선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명중시키는 데 성공하여 우주공간에서 소련의 핵미사일 격파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게 됩니다. 후에 1989년 4월 레이저무기 '알파'에 대한 시험이 성공합니다. 미국의 SDI 계획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군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 개념도

- 핵안보의 중요한 기둥 : 핵물질 방호협약(CPPNM)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실시합니다. 이에 미국은 핵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품목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요. 1974년 UN총회에서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가 핵물질의 방호에 관한 협약(CPPNM : Convention of the Physical Protection of Nuclear Materials)을 제창합니다. 핵물질의 국제 운송 과정에서 테러나 불법적 행동을 통해 핵물질의 불법취득과 거래를 방지하는 목적으로 핵물질에 대한 방호를 구체화, 법문화 시킨 것이지요.

  사실 1970년대에 IAEA에서 '핵물질 방호에 관한 지침'이라는 이름으로 핵물질 방호에 대한 기본 내용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972년 IAEA 주도로 전문가 그룹이 모여 핵물질에 대한 물리적 방호에 대한 방침과 체계, 조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한 것이지요.
IAEAIC/225의 첫 번째 버전

  IAEA에서는 이를 IAEA Information Circular/225라는 이름으로 1975년에 공식 발간하였습니다. 핵물질의 물리적 방호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된 것이라는 의의를 가집니다. 하지만 IAEAIC/225는 단순히 IAEA의 권고안일 뿐이지 강제 규범은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1979년 IAEA에서의 핵물질 방호협약 CPPNM이 채택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시기에 희미하게 논의되면 핵물질 방호가 핵물질 방호협약 CPPNM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협약 형태로 나타난 것이지요. 마침내 1987년 2월 8일에 CPPNM이 발효됩니다.
핵물질 방호협약 (CPPNM)의 원본

  CPPNM에서는 각국 내에서 핵물질과 국제 이동중인 핵물질에 대해 물리적 방호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4조), 핵물질의 도난과 횡령, 탈취 등의 위법한 행위를 할 경우 처벌을 명문화시키는 의무(7조)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호 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핵물질에 대해 수출과 수입을 허가하지 않는 조항(4조)도 명시되어 있지요. 

  핵무기를 만드는 데에 가장 힘든 것은 핵물질을 입수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핵물질에 대한 방호에 관한 내용의 논의가 있었지만, CPPNM의 발효를 통해 핵물질에 대한 방호의 의무와,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명문화 하였다는 것은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의 확산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조치라는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 반전된 분위기 : 고르바초프의 등장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간의 데탕트를 이끌어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공산권을 유지하기 위해 1968년 체코 프라하를 탱크로 진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간의 데탕트는 깨어집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국제사회의 반전운동을 촉발시켰고, 미국의 외교적 고립을 가져왔으며, 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내부 경제사정으로 인해 소련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등장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악화된 냉전 분위기는 다시 한 번 반전됩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내세운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진행하면서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게 되고, 이런 외교정책이 바뀜에 따라 1986년 레이카비크 정상회담에서 다시 전략핵무기의 감축에 대한 논의(START)가 진행됩니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핵무기의 위협에서 양국이 벗어날 수 있는 협상의 물꼬를 트게 되었습니다.
<관련 사이트>

전략무기제한협정 SALT-I 전문보기 - 영문
전략무기제한협정 SALT-II 전문보기 - 영문
IAEAIC/255 핵물질방호에 관한 지침(초판) 전문보기 - 영문
핵물질 방호협약 (CPPNM) 전문보기 - 영문 / 한글번역

(계속)
이 글은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개최에 대한 이해와 홍보를 돕기 위해 작성하였으며,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의 공식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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